2018년 2015 개정교육과정이 중1에게 적용될 때,
과학 교과의 가장 큰 변화 중 하나는 '생물의 다양성' 단원의 추가였다.
생물의 5계 분류와 종의 개념, 생물 다양성 및 보전에 대해 학습하는 해당 단원은
힘과 빛, 상태 변화와 기체 법칙 등에 대해 배우는 여타 단원에 비해 '과학적'인 느낌이 적었고
심화 학습 요소도 적었기에 '그냥 외우면 되네' 정도로만 여길 뿐, 중요도를 낮게 볼 수밖에 없었다.
허나 이후 영재학교나 과학고 등 학생들의 과학적 사고 능력을 다각도로 평가하는 특목 입시에서
'생물의 다양성' 단원은 빠지지 않고 출제되었다.
그들은 생물들 간의 유기적 관계, 환경과 생존의 문제에 대한 생각을 묻거나
간단히는 5계 분류 능력을 평가하였고
관련 업계에 종하사는 나와 동료들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었다.
그러나
오늘에서야 [자연에 이름 붙이기]를 읽고 나니
이런 흐름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세계에 대한 본성적 탐구를 과학계에 일임했다.
언젠가 너무도 '자연'스레 소중히 여기고 연구하고 그와 함께 살던
생명 세계의 시각을 스스로 폐기했다.
나만 해도, 길가에서 식물원에서 생명을 마주할 때
그의 모양새를 충분히 만끽하기도 전에
옆에 꽂힌 설명서를 먼저 참고했고, 네이버 렌즈에 의존하여 이름과 종과 속을 알아보는 걸 우선했다.
내 눈으로 코로 손으로 자연을 감각하고 있음에도
'정말로' 무엇인지 과학에 물어보기 전엔 그를 의심하고 있던 거다.
그 덕에 우리는 물고기를 잃었고,
새가 공룡이라는 사실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채 머리에 주입하게 되었다.
내가 먹는 식재료가 어떤 것인지 모르고
(그렇지만 궁금해하지도 않으며)
매일 지나다니는 길가에 그늘을 향기를 아름다움을 내어 주는 가로수가
어떻게 생긴 것인지도 기억해 내지 못하는 지금
생물을 유심히 관찰하고 삶의 기전을 탐구하며 보전에 대한 사고에 몰두할 수 있다는 건
명멸하는 우리의 움벨트에 다시 빛을 틔울
과학계를 너머 인간계에 필요한 소중한 능력일 것이다.
이렇게
나의 움벨트를 되찾아야겠다는 결론에 다다르기까지
이 책이 선사하는 분류학의 역사, 그 안의 저항과 갈등은 그저 너무나도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 다수가 흥미로워하는 역사 주제조차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편임에도)
이건 정말 잘 만든 드라마 같았다.
플롯 자체도 재미있을 수밖에 없고, 작가의 필력도 한몫 했다.
린나이우스를 필두로 한 분류학의 서막에서
폭풍을 불러올 다윈의 따개비 연구와 진화 개념의 등장
병합파와 세분파의 갈등, 마이어의 종의 정의와 한계,
이후 지속적인 '진화'와 '진화분류학' 간의 모순
이를 가속화시키는 점차 선명해지는 움벨트의 존재론
이후 통계와 분석을 대안으로 등장한 수리분류학과
화학까지 끼얹은 분자분류학
논리와 과학의 키워드로 전통분류학자들이 쳐맞고 있을 때
진짜 '진화'를 내세워 기성 분류학 모두를 내리까는 끝판왕 분기학의 등장
그치만 여즉 움벨트를 버리지 못하는 비련의 진화분류학
이 서사의 끝까지 집중하다 보니
우리의 분류학이 불쌍해졌다.
비운의 드라마 주인공을 응원하는 마음이었다.
나는 진화를 좋아한다.
거의 모든걸 설명하는 최고로 흥미로운 개념이다.
그치만... 그치만 나는 물고기가 사라지는 걸 바라지 않는다.
사랑해 마지않는 새들도
멋지게 하늘을 나는 가볍고 귀여운 생명체로 남았으면 한다.
나에게 그들이 그렇게 존재하고, 여러분들에게도 그렇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연에 이름을 붙여 보자.
나의 세계가 나의 세계라는걸 받아들여 보자.
생명을 바라보는 민주적인 방식. 이를 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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