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흘, 여정의 절반을 지나 끝을 향해가고 있던 때
아쉬움과 피곤함이 공존하던 그때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
전날 밤 컵라면과 누룽지로 아침식사를 하자 말하고 잠들었던지라, 아침에 모두가 드릉거리며 작고 소중한 돗자리 위로 모였다.
컵라면에 누룽지를 쏟아붓고 끓인 물을 부어 먹었다. 누룽지가 킥이었다. 한국에서 무겁게 공수해 간 보람이 있었다. 모두가 구수한 맛에 감격하고 극찬했다.

밥을 순식간에 비우고 우리의 멋쟁이 동행인이 가져온 드립백 커피를 마셨다.
비록 귤 향이 나서 요상한 느낌이기는 했지만, 간만에 느끼는 모닝커피는 달콤했다.
물론 모닝커피도 위스키와 같은 스뎅 그릇에 먹는 것이 이곳의 룰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일찍 공연을 보러 나왔다.
Say She She라는 여성 알앤비 트리오를 보러 웨스트홀츠로 향하는 길
신문을 사면 주는 가방을 받기 위해 가디언지 부스를 찾아갔다가 길을 잘못 들어 공연의 앞 두 곡 정도를 놓치고 말았다.
제발 Forget me not은 아직 하지 말아달라고 되뇌이며 흙먼지 날리는 길을 뛰어갔다.

도착!
다행히도 그토록 듣고팠던 포겟미낫은 도착 후에 시작했다.
쎄이쉬쉬는 KEXP 채널에서 우연히 본 후에 맘에 쏙 들어 꼭 보고팠던 팀이었다.
세 보컬 여성의 에너지도 상당히 좋고, 표정 등의 에티튜드도 기분을 좋게 만든다. 게다가 세션의 역량이 상당하다. 멋진 보컬에 멋진 연주가 조화로워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 있는 팀이다.
역시 기대했던 것 만큼의 즐거운 무대였다. 흑백의 옷을 맞춰 입고 나온 언니들은 통통 튀면서 신나게 무대를 즐겼고, 덕분에 나 또한 딱 '즐거운' 상태로 이 날의 여정을 시작할 수 있었다.
무대가 끝나고 사이트 구경을 하다 점심식사를 했다.
스리랑카 식당을 발견하고 반가운 맘에 달커리를 시켜 먹었는데, 스리랑카에서 결코 먹어본 적 없는 밍숭맹숭한 커리 맛이었다.
그나마 위에 올려진 정체를 알 수 없는 잼과 함께 먹으니 먹을만 했다만 또다시 궁금하다. 영국인들 맛있다는 감각이 뭔지는 아는 걸까?



여차저차 배를 채우고 우지스로 향했다. 일찍 간 김에 그럭저럭 궁금했던 Working men's club의 무대부터 감상했다.
아 첫 두 곡 정도까지는 재미있게 들었는데, 계속되는 비슷한 무빙과 리듬에 금새 지치고 말았다. 프론트맨의 자유분방한 움직임에 대비되게 나머지 멤바들은 정말 가만히만 있었다. 그 모습이 사람을 질리게 했다. 신선함은 오래 유지되지 않았다.
다음은 The Murder Capital의 무대
머더캐피탈은 동행인 중 한 명이 들어보라며 미리 소개시켜준 밴드였는데 첨 들었을 때부터 왕왕거리는 사운드가 맘에 쏙 들었다.
페스티벌 전후로 이 분이 알려준 밴드들 중 마음에 드는 팀이 많았다. 덕분에 여러 모로 음악 스펙트럼이 넓어졌다. 제가 많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동행님
무대는 상당했다. 기대 이상이었다. 영국에서 본 가장 인상깊은 무대를 하나만 꼽으라면 머더캐피탈을 꼽을 거다.
프론트맨의 퍼포밍엔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었고, 베이시스트의 묵직한 존재감이 상당했다.
영상이나 음원으로 듣는 것보다 훨씬 촘촘하고 웅장했다. 공연을 보는 내내 무언가에 사로잡혀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음악은 우지스의 온 공간을 잡아먹고 있었다.
게다가 공연이 끝나자 프론트맨이 무대 아래로 내려오더니만 여자친구를 찾아 덥썩 키갈을(헉) 날렸다. 심지어 여자친구는 상당히 아리따워서 내가 무슨 영화를 보고 있나 싶었다. 와씨 이건 뭐지? 이게 락스타의 사랑법인가?
언젠가 그 언젠가 내한을 오게 된다면 꼭 펜스를 잡으리라 다짐했고, 곧바로 인스타그램 팔로잉을 시작했다. (인스타에도 예쁜 여자친구와의 힙한 사진이 왕왕 올라온다. 예쁜사랑 하세요우...♡)


머더캐피탈의 여흥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셰임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글래스턴베리 라인업 중 평소 알고 있던 몇 안되는 밴드였던지라 무대를 보고 싶었는데 한 세 곡쯤 봤을까, 이건 아니다 싶었다. 정신머리가 없었다. 음악이 어땠는지는 차치한다. 베이시스트는 그 긴 넥의 베이스를 맨 채로 공중 앞돌기를 하고 있었고, 보컬은 온 무대를 뛰어다녔다.
재밌는 포인트는 같이 있던 동행과 정확히 같은 시점에 그만 보고 돌아가자는 눈짓을 주고받았다는 점. 같은 생각을 하고 있어 다행이었다. 누구 하나 아쉬움 없이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한국에 와서 유투브에 올라온 영상을 보니 보컬이 후에 바지를 벗더라. 그만 보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티피에 와서는 또 술을 마시고, 또 드러누워 쉬었다.
이곳에선 늘 잠깐씩의 휴식 시간이 필요했다. 길고 긴 낮을 버티려면 충전이 필요했다.


저녁 시간에는 리조를 보러 갈지, 글랜한사드를 보러 갈지 고민하다 결국 글랜 한사드를 보러 갔다.
무려 원스의 그 Glen Hansard다. 어린 시절 몇 번을 돌려봤던 명작 영화 원스... 이...퓨..원ㅌ..미... 새디스...펙ㅌ...미....
이후 글랜한사드가 어떤 행보를 이어가는지 전혀 알지 못했지만, 일단 추억 속의 그이기에 믿고 보러 갔다.
글랜한사드의 공연은 어쿠스틱 스테이지였다.
시네마 옆쪽에 있었는데, 꽤나 동떨어진 곳에 있어 이 기회 아니면 갈 일이 없을 위치였다.
가는 길에 그 유명한 카톤헨지 (이렇게 부르는게 맞나?)도 구경했다.


시간 딱 맞춰 도착했음에도 어쿠스틱 스테이지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거의 2?3?열쯤의 정중앙에서 감상할 수 있었다.
겉모습은 많이 변했지만 그의 목소리는 여전했다. 여전히 듣는 이를 설득하는, 호소력 있는 목소리였다.
아는 곡은 When your mind's made up 하나 뿐이었지만, 추억의 목소리라는 한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덧붙이자면 이 아저씨 생각보다 수다쟁이에 장난기도 있는 것 같았다. 영국인들의 농담을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관객들과 나누는 소통의 모양이 알록달록했다.

글랜한사드를 보고, 다른 사람들과 다같이 헤드라이너를 즐기기 위해 피라미드로 향했다.
가는 길에 핫 애플 사이다 라는걸 사마셔봤는데, 핫이 spicy 정도의 의미인줄 알았구만 뜨겁다는 의미였다.
따뜻한 소머스비...같은.... 이상한 맛의 무언가였다. 약같았다.

이날의 헤드라이너는 건즈앤로지스
평소 좋아하진 않아도 헤드니까 공연을 봐야겠단 생각으로 예습도 열심히 해 갔건만, 그다지 재미있지가 않았다.
꽤나 가까이 있었는데도 그저 유튜브로 보는 느낌이었다. 액슬로즈의 목소리가 자꾸 아슬아슬해서 불안했다.
결국 이보다는 더 재미있는 즐길거리가 있겠지 생각하며 먼저 자리를 떴다.

둘째날 밤에 잠시 즐겼던 글라스토 라티노에 가봤지만 자유 댄스 타임이어서 차마 놀 수가 없었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가 센세이션이라는 무대 앞에서 잠시 시간을 보냈다.
쫄쫄이 의상을 입은 엠씨 3명이 관객들과 춤추다가 한 명을 픽해 무대로 올리고, 그가 돌림판을 돌려 나오는 주제에 맞게 디제잉을 하는 형태의 클러빙이었다.
내 또래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떼창을 하고 신나게 춤추는 걸 보니 우리로 치면 동방신기나 슈주쯤 되는 추억의 노래들인 것 같았다. 사람 사는 것 다 똑같구나 싶었다.
서커스장에 가니 아주 자극적인 공연이 진행되고 있었다.
셋째날 가본 어린이들이 보던 것과는 사뭇 달랐다. 남녀가 함께 줄에 매달려 멋진 눈빛과 자세를 잡는 그런... 아주 섹슈얼한 서커스였다. 아 시간을 좀 더 내서 밤에 서커스를 더 볼 걸

그 외에도 립싱크 오페라나 소소한 연극같은것도 구경했다. 이게 진짜 축제구나, 무대만이 다가 아니라는게 이런 거구나. 라고 마지막 날이 다가와서야 느꼈다.

한참 구경하다 화장실이 급해져서 (우리의 티피 우리의 소중한 화장실)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와서 얘기하지만 글래스톤베리의 최대 단점을 꼽으라면 화장실이다. 질서와 청결이 없는 무법지대 화장실은 공포의 대상이어서, 나는 5일간 단 한 번을 제외하면 모두 티피구역 내 화장실을 사용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사람들이 다 옹기종기 모여서 뭔갈 먹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도 건즈앤로지스를 보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단다.
내가 자리를 뜨고 나서 그들도 다같이 집으로 돌아왔다고.
이게 한국인이어서인지, 아님 잘 맞는 사람들을 만난 건지 예상치 못한 부분들에서 통하는 게 많긴 많았다.
술도 한잔 더 하고, 잘 준비도 마쳤으나 다음날이 마지막 날이라는 사실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아쉬운 자들끼리 조금만 더 놀다 들어오자며 의기투합하여 밖으로 나왔다.
펍에 들어가서 한 잔 하고 싶었으나, 밤낮을 모르는 사람들이 바글바글해서 다 포기
그저 페스티벌 사이트를 한바퀴 돌다 들어왔다.

아카디아를 지나고, 레빗홀을 지나고, 여기저기 돌다 보니 텅 빈 피라미드에 다다랐다.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의 환희가 가득했던 공간에는 가득한 쓰레기만 남아 있었다.
괴이한 광경이었다. 환경 친화적인 페스티벌이라고 말하는 이곳 글래스톤베리의 실상은 이런 거였다.
모든 것엔 양면성이 있다지만, 이런 양극단이 과연 맞는 것인지에 대해 회의가 들었다.
찜찜한 마음으로 드넓은 사이트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집에 돌아갈 때 쯤엔 저 멀리 동이 트고 있었다.


마지막 날의 아쉬움을 받아들일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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