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공연 후기

[2023 글래스톤베리] 230623 Day 3

드디어 본격 공연 시작의 날이 밝았다. 
일찍 일어나 전날 줄이 길어 가보지 못한 리본 타워에 올라 보았다.

올라와서 본 풍경은 사실 그리 멋지다 할 건 없었다.
그저.. 넓은 평야와... 그곳을 가득 메운 텐트들 그리고 계속 드는 의문. 이사람들 본인 텐트 어떻게 찾아가는 것일지
그래도 올라왔으니 이빨 보이며 사진 여러 장 찍고 내려갔다. 

저 멀리 뭐가 있는 것 같다면 그게 다 텐트다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이 열리는 워시팜이라는 이 거대 농장에는 우유가 유명하단다.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일 아침마다 우유와 시리얼을 먹는다고는 하던데, 우리는 셋째날 첨으로 시도해 보았다.
수많은 가게들 중 소 모양 조형물이 매달려 있는 곳에 가면 그곳에서 우유와 쥬스 등을 팔고 있었다.
유당불내증을 가진 평범한 한국인인 나는 친구가 사본 것을 반모금쯤 먹어본 것이 전부였는데, 파스퇴르 우유같은 맛이었다. 

우유 잘 마시는 사람들 피셜로는 맛있는 맛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침을 사먹었다. 뭔 인도식인지 싶은 토마토 스튜같은 거였는데, 위에 계란도 얹어져 있어 든든하니 3일 내 사먹은 음식 중 가장 맛있었다. 

맛있는거 찾기 어려운 이곳에서 맛있던 것


 
아침산책을 마친 후 숙소로 입성~ 늘 그렇듯 모닝위스키타임을 가졌다. 
한국에서는 큰맘먹고 한 잔에 만오천원씩이나 주고 마시던 것들을 아침이고 낮이고 밤이고 스뎅그릇에 마셨다. 
이 경험 정말 귀하고... 귀하다

날것의 풍경


 
이곳의 낮시간은 상당히 뜨겁다. 실시간으로 구워져서 지치는 날씨.
그래서인지 우리의 동행여러분들은 낮시간을 주로 집에서 낮잠을 자거나 (술마시면 자야지!) 여유를 부리며 지내곤 했다.
나는 아까운걸 못참는 사람인지라 더워도 매일 일단 밖으로 나왔다. 
 
집 옆에 포토부스가 있길래 혼자 찍어봤는데, 우리내 인생네컷을 상상하며 여유부리면 안되는 무언가였다.
앉아서 돈 집어넣자마자 깜빡이 없이 3,2,1 찰칵
한국인 성질머리보다 빠른 촬영 속도에 정신없이 어정쩡한 네컷이 탄생했다.
급해가지고 띠용거리는 얼굴이 꽤나 묘한데 그래도 아주 좋은 기념품이 남겨졌다.

포토부스의 추억
요정들이 춤출 것 같은 원형 배치의 돌이 있던 곳
이것도 뭔 유명한 나무 조형물인데... 뭐 아는 게 없네 나


 
이날은 우리나라 밴드인 악단광칠의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한국에서는 온스테이지 무대만 몇 번 본 적 있고 관심 없는 밴드였는데, 그래도 국위선양하시는 분들 기 살려주려고, 영국까지 와서 한국밴드 보는게 재밌을 것 같아서 보기로 결정.
공연까지 시간이 좀 남아 그 근처 서커스 존으로 가보았다.
 
글래스턴베리는 뮤직페스티벌이 아니라 그냥 '페스티벌'이다. 그만큼 음악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의 장르들을 접할 수 있는데, 연극, 영화, 서커스, 그리고 다양한 그래피티나 여타 그림 작품들을 경험할 수 있다. 
그 중 서커스는 꽤나 규모있게 존이 꾸려져 있는데, 체험을 할 수도 있고 공연을 관람할 수도 있고 서커스 용품을 구매할 수도 있게 되어있다. 
이날은 그늘이 필요한 날씨였기에 실내 공연장에 들어와서 서커스 공연을 감상했다. 
학생들부터 프로 서커스 전문가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공연을 펼쳤다. 
이전에 원데이클래스로 서커스를 배워본 적이 있어서 서커스라는 장르 자체에 관심이 있는지라 (서커스란 생각보다 사아아아아아앙당히 어렵다는 점을 배우고 왔다.) 상당히 만족스럽게 관람했다. 
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모두 순간을 즐기고 있었다. 

저글링은 쉬워보이지만 쉽지 않다


 
점심때가 되어 악단광칠 전 점심을 먹고자 웨스트홀츠로 근처로 왔다.
우선 펍으로 가서 맥주를 한 잔 시켰다. 근데 주문받던 친구가 심각한 얼굴로 나를 보고 '두유해브애니아이디어?' 라고 물었다.
그래서 엥 뭔가 더 필요하냐는 물음인가 싶어 '나띵' 이라 답했다.
그랬더니 당황해서 근처 동료한테 가더니 웅성웅성거리는 거다. 왜이러지. 내가 맥주 시킨게 문제가 있나. 덩달아 나도 당황해서 문제를 해결하고싶다는 최대한의 표정을 지어 '애니 프라블럼?' 이라고 물었다.
그러더니 또 뭐라뭐라 하는 거다. 영국놈들 악센트 못알아듣겠어서 하 포기할까 생각중이었는데 그중 들리는 선명한 단어 '패스포트'
그렇다. 두유해브애니'아이디어' 가 아니라 '아이디' 였던 거다. 
단발의 동양인 여자애가 반바지차림으로 혼자 돌아다니니 미성년잔줄 알았나보다. 
허허거리며 여권들이밀었더니 놀란 눈으로 날 보며 '나인티투??' 하더라.
그래서 또 허허거리며 ‘옛스옛스... 마이 에이지... 오버 써리... ’했다. 어이없어서 맥주받고 서로 쏘리쏘리하면서 펍을 나섰다. 이게 기분 좋아야하는건지 말아야하는건지 

문제의 맥주. 맛은 좋았다


 
어렵사리 맥주 사고, 맛대가리없는 두부튀김덮밥을 먹었다. 그리고 악단광칠을 기다렸다.

영국인들 맛이 뭔지 알긴 하는걸까?


 
영국에 온 한국인들은 다 여기 집결해 있었다. 
나락도 락이다 깃발도 보고, K-DOG 깃발도 봤다. 타국에서 보는 아련한 진돗개의 눈망울이 인상깊었다.
아 그리고 한 서양인 커플이 태극기를 들고 무대 앞쪽에 있었다 그사람들 정체가 뭐였을까?


펄럭...
펄럭....2


 
악단광칠의 공연은 어메이징했다. 
처음에 마이크가 나오지 않는 사고가 있던 점은 아쉬웠지만, (이놈자식들 우리언니 꾀꼬리같은 목소리 내놔) 
공연 정말 잘 하고, 분위기도 정말 좋았다. 역시 화면을 통해 보는 것이 다가 아니었다. 실전 공연에서의 에너지로 팬들을 쓸어모을 것 같은 팀이었다. 
대금, 피리, 생황, 아쟁, 가야금... 특히 바라? 를 치는 선우바라바라바라밤 님 넘 멋있었다. 바라마스터이시어...
 
외국인들도 우리내 리듬에 맞추어 들썩이고 즐기는 걸 보니 국뽕이 차올랐다. 우리것이..좋은 것이여...!!
동행인 여섯 중 악단광칠 본다고 오피셜리 선언한 사람 나뿐이었는데, 결국 네 명이나 관람했다. 이 츤데레같은 한국인들

공연 진짜 잘한다. 더 흥했으면 진심으루


 
악단광칠까지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잠시 정비를 하고 피라미드로 가기 위함이었다.

돌아가는 길이었던 것 같다. 골때리게 귀여운 핵발전 반대선언


 
글래스톤베리 5일 중 나는 이 날을 가장 기대하고 있었는데,
바로 the Churnups - Royal Blood - Arctic Monkeys로 이어지는 피라미드 3연타 때문이었다. 
 
악틱이 나온단 소문으로 글래스톤베리 티켓팅을 시도하게 되었고
왔으면 좋겠다고 기대하는 밴드를 누가 물어볼 때 항상 로열블러드라 답했었다.
미지의 밴드 쳔업은 아마 푸파이터스, 혹은 데이브그롤 솔로 혹은 그롤과 몇몇의 특별 공연 쯤으로 예상되고 있었다.
리암과 함께 잠실 내한공연을 왔을 때 푸파이터스에 빠진 이후 그들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에 기대감이 최고조로 올라와 있었다.
 
아침부터 야단 떨면서 푸파이터스 티셔츠를 입고 다녔는데 오피셜리 쳔업이 누구인지 뜨지 않아 섭섭하던 찰나 
티피에서 쉬는 동안, 드디어 트위터에 올라왔다. 데이브그롤이 글래스톤베리에서 목격되었다는 사진이!
그 소식을 듣고 마주치는 동행인들에게 그롤왔대!!!!!!!! 를 소리쳤다. 
이후 그들에게 들은 바로는 그때 내 표정이 상당히 행복해 보였다고 한다. 맞다. 너무 행복했다.
 

나를 설레게 한 트윗
떡상한 나의 티샤쓰



그렇게 들뜬 마음으로 룰루랄라 피라미드 원정을 떠났다. 
사람이 많이 몰릴걸 예상하고 한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웬걸 사람이 정말 많았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넓은 한 공간에 있는 건 처음 보는지라 (한국에서 사람이 모이는 자리는 있어도 이렇게 트인 곳에 모이는건 볼 일이 없다.) 당황스러웠다.
이런 인파라면 나는 어디서 관람하나 싶었는데, 여유로운 양인들 듬성듬성 자리잡아둔 거라 사람을 뚫고 들어가니 뚫고 들어가지긴 했다.  
앞쪽은 아니어도 정면에서 무대를 바라볼 수 있는 곳에 동행 여섯 모두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다.

떼거지


 
피라미드 무대쪽에 해가 위치해 있어서 정말 뜨거웠다. 지글지글 구워지는 느낌.. 이날 이 자리에서 피부가 상당히 새카매졌던 것 같다. 

햇빛이 느껴지는 사진


 
공연이 시작되고 무대에 "FF" 로고가 뜨자, 정말 크게 소리질렀던 것 같다. 
와!! 푸파이터스야!!!!!!!!!!!!!!!!!!!!
그리고 그 뒤의 기억은.. 정말 오락가락했다. 
그저 신나서 흔들고 흔들다가, 호킨스가 없다는 사실에 갑자기 힘들다가, 그래도 자리를 매워서 공연을 이어나가는 이들에게 감사하다가, 딸램과 함께 노래부르는 그롤을 보며 또 울컥하다가, 베스트오브유를 따라부르다가 갑자기 멍해졌다.
움직임을 멈추고 상황을 가만히 바라보다 보니, 이렇게 수십만의 사람들이 신나있으면 그 어딘가에는 수십만이 슬퍼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현실적이었다. 
한시간이 어찌 지났는지 모르겠다. 사진도 없다. 도파민에 절여진 채 무대가 끝났다.
 
쳔업이 끝나자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갔다. 로열블러드는 그정도 짬바가 아니지 싶었다. 
그치만 내게는 기회였다. 잠시 동행인들에게서 빠져나와 앞으로 가서 공연을 관람했다. 이친구들 얼굴을 전광판이 아닌 내 생눈으로 보고 싶었다.  
공연 잘하는 건 여러 영상을 보며 알고 있었는데, 체감하는건 달랐다.
두 명이 만드는 꽉 채워지는 흑백의 사운드는 말 그대로 '멋'이었다. 난 멋있는게 좋다. 늘 멋을 잃지 않고 싶어 멋있는 것을 따르고 쫓으려 한다. 그에 있어 로열블러드는 탁월한 선택이었다.

멋 멋 멋 멋
로열블러드 찍다가 월리랑 인사도 했다


 
앞쪽에서의 관람은 좋았지만, 끝도 없는 인파에서 동행인을 다시 찾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은 나를 결국 금방 원래 자리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이도 쉽지는 않았다. 워낙 넓은 부지에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라 깃발들을 등대삼아 찾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 초록색 깃발이었나? 를 보고 겨우 동행인들을 찾아 돌아왔다. 
그러고보니 아까 사람이 더 많았을 푸파이터스 때에는 동행인 중 한 명이 맥주를 사오겠다며 호기롭게 빠져나간 뒤 공연 절반쯤이 지난 후에야 우릴 찾아 돌아왔었다. 어찌나 걱정스러웠던지, 돌아왔을 때는 영웅같았다. 맥주 존맛탱이었다.
늦었지만 다시 한 번 그에게 박수를 보낸다,,,

그가 사왔던 맥주 우리의 영웅


 
로열블러드까지 끝난 후 사람들이 다시 몰려들었다. 그렇다. 악틱은 영국 인디록 씬의 마지막 구세주였다. 
유튜브에서만 보던 홍염을 터트리는 외국인들, 목마를 타는 외국인들이 한바가지였다. 영상 속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었다. 
터너의 카리스마는 수만을 휘어잡았다. 한쪽 다리를 올리고 한쪽 팔을 활짝 펼친 채 수트를 입고 노래하는 그는 종교인같았다. 모두가 취해있었다.
글래스톤베리에 도전해야겠단 생각은 악틱의 '아밷댓유룩굿온더댄스플로어' 떼창을 듣고싶다. 나도 하고싶다. 에서 출발했었다. 그리고 그를 달성했다. 달성하니 되려 허무했다. 목적 달성의 짜릿함은 잠시뿐... 

터너 교주님
피라미드 헤드라이너의 위엄
홍염이 만드는 분위기는 특별하다


 
악틱 공연은 꽤나 길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 기억이 거의 휘발되었다. 현타 이후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분명한 건 공연은 멋졌고, 이상하게 마음은 차분했다. 
 
아 그리고 동행인들 끼리의 유행어가 만들어졌다.  '땡큐! 베뤼 머치!'
 
 
누군가에게 이때의 감정을 설명하기 어려울 거라 생각했는데 말로 쓰려니 더 어렵다. 
브릿팝에 빠졌던 10대 때부터 막연히 가보고싶다 생각했던 곳에 왔고 꿈에 그리던 것을 이룩하고 나니 
이게 왜이리 어려웠을까 아니지 어려운게 맞지 / 나의 감정은 즐겁기만 바랐는데 이게 즐거운게 맞나? 즐겁기는 하다만 /  등 내면에서 나와 나의 싸움이 벌어졌다. 
지금도 이해하기는 힘들지만, 가치있는 경험이었다. 경계없는 생각이지만 그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