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래스톤베리에 다녀온지 어언 반년이 지났다.
불쌍한 파워직장인인 나에겐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인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만 딱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화요일 저녁에 런던에 도착하고, 월요일에 한국으로 나가는 여정
그래서 그 알찼던 5일을 뭐라도 남겨놔야할 것만 같다.
한 해가 지나기 전 뭐라도 적어놔야 기억이 덜 휘발되겠지
전날밤 호텔이지만 호스텔보다 자그마한 골방같은 곳에서 잠을 자고
낑낑거리며 짐덩어리를 앞뒤로 맨 채 한국에서 몇 번 만났지만 미처 말도 못 놓은 동행 일부를 만났다.
또래임에도 불구하고 과분한 배려심으로 서로에 대한 정보를 캐내지 않던 착하디 착한 여러분들...

그치만?
꿈에그리던 글래스톤베리 버프 덕인지 용기내서 건넨 '말놓을까요?' 한 마디에 아주 수월히 말을 놓고 순식간에 칭구칭긔가 되어버렸다.
이럴거면 왜들 그렇게 서먹거렸던 것일까 아직도 미스테리하다
하여간
마트에 가서 장을 보고(라고 말하고 '1인1싱글몰트 구매하기'라 읽는다) 예매해둔 코치를 타러 정류장으로 갔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등딱지를 맨 양인들의 행렬이 장관을 이루었다.

코치를 타고, 그 유명한 런던의 트래픽잼을 느끼고, 달리는듯 걷는듯 한 속도로 글래스톤베리를 향해 갔다.
가는 도중 갑자기 스톤헨지도 봤다.
런던에서 코치타고 글래스톤베리에 가는 분들은 버스 오른쪽에 앉으면 선명한 스톤헨지를 감상할 수 있다.
짧은 기간에 뭐라도 하나 더 봤다는 안도감을 얻을 수 있으니 강추한다.

지겨워 / 언제도착해 / 늦으면 안되는데 / 나에겐 5일뿐인데 라는 조급한 마음으로 기다리다보니
글래스톤베리에 도착했다. 근처에 오니 여기저기 GLASTONBURY라는 11글자가 보이는데 아주 두근거렸다.


코치서 내리고, 한국에서 공수해간 깔때기로 싱글몰트를 페트병에 담고(병 반입이 안된다길래...)
인터네셔널 티켓콜랙션을 찾아가 티켓을 수령하고, 팔찌를 수령했다.


그 짧은 과정에서 만난 몇 명의 직원들은 너무너무 친절했다.
쾌활하게 웃고 상냥하게 말해줬다. 유럽놈들이 동양인 무시하면 어쩌지 싶던 걱정이 녹았다.
그들 덕분에 글래스톤베리의 첫인상이 너무나도 좋았다.
그러고보니 난 오늘 만난 사람들에게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나 싶다
아마도 별로 좋지는 않은 표정이었을 것 같은데... 내일은 좀 신경써봐야지 돈드는 것도 아니니까
뭐여튼간에 드뎌 부지에 입장했다. 그리고 머나먼 티피를 향한 대장정이 시작되었다.
우리의 숙소인 티피... 지도를 봤을 때는 스테이지 젤 근처니까 찾아가기 쉬울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부지는 정말 상상보다 더 크다
정말 크다
저어엉말 크다
너무 넓다보니 처음 와보는 곳에서는 방향을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지나가다 보이는 거의 모든 직원들에게 물어봤는데
너무 어이없게도 그들이 다 다른 말을 했다.
정직하게 모른다고 답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걷다 보면 표지판이 나온다는 사람도 있었고,
특정 방향을 가리키며 이쪽이라는 사람도 있었고(물론 그 방향이 아니었다.)
지도를 함께 들여다봐주기는 하나 지도를 읽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감으로 대충 저긴거 같다 싶은 쪽으로 걷고 또 걸었다
10키로여 되는 가방을 매고 앞에도 배낭을 매고 술을 한 병씩 들고 30분 넘게 걸었던 것 같다.
6월의 영국은 햇빛이 아주 뜨겁다. 땀이 좔좔 나고 얼굴은 잘 익은 토마토가 되었다.
그리고 저 멀리 TIPI 라는 글자가 보였다. 어찌나 반갑던지
리셉션에 터덜터덜 도착하자 그곳의 직원들이 우리를 보고 박수를 쳐줬다.
많이 힘들어보였나보다. 물론 힘들었다.
리셉션에서는 예약을 확인하고, 텐트를 선착순으로 배정한다.
대충 손으로 만든 티피존 그림에 동그라미로 텐트 위치를 그려둔 종이를 들이밀더니, 그 중 하나를 고르라고 했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만난 아날로그는 당황스러웠지만 재밌었다. 이렇게도 일이 되는구나.
입구와 화장실과 무대와의 거리를 조합해서 (실은 암것도 모르고 걍 대충 감으로) 위치를 골랐고
그렇게 우리의 175호 집을 마련했다. 내집마련의 꿈 달성...!


티피에 짐을 풀고 좀 쉬다가 바깥 구경을 하러 나갔다.
별천지였다. 이게뭐야 휘둥그레 저게뭐야 휘둥그레 어디가서 물통을 수령하는거야 어디가서 엠디를 사는거야
혼란하고 정신사납고 깃발이 오만 곳에서 펄럭이고
입성 기념으로 바로 티셔츠부터 구매하고, 첫끼니를 먹었다. 타코였나.. 사실 맛은 기억이 잘 안난다. 뭐라도 먹었다는 게 중요하다. (이건 5일 내내 그랬다.)




해가 지니 급격히 쌀쌀해졌다.
옷을 좀 더 껴입고, 좀 더 늦게 도착한 동행들과 합류해서 술을 마셨다.
많이 마셨다. 위스키를 열심히 마셨다. 어우...사실 담날 숙취가 심했다.
그치만 이 덕에 동행 여섯이 드뎌 다 편해졌다. 의미있는 숙취였다고(?) 하자.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의 첫날인 수요일 저녁에는 개최를 기념하는 불꽃놀이와 커다란 구조물에 불을 붙이는 퍼포먼스를 한다.
그걸 구경하려고 바깥으로 나와서 자리를 깔고 구경했는데 사실 이건 아주 볼품없었다.
티피존이 그 세리머니 장소와 가까워서 그랬는지, 연기가 너무 자욱해서 그저 웃겼다.
환호하기엔 작은 불꽃과 연기만 자욱한 불꽃......

그렇게 어이없는 불꽃과 위스키에 취해서 첫날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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