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날은 아침부터 서둘렀다.
무려 오전 11시 30분에 시작하는 파크 첫 타임의 공연을 보고 싶었기 때문.
일찍부터 밥 든든히 먹고
최대한 편한 옷을 챙겨 입고,
어제와 다른 맑은 아침 공기를 누리다가
맥주 한 잔 사들고 파크 앞에 일찍 앉아 자리를 잡았다.
기다리던 팀은 Horsegirl이었다.
애플뮤직의 추천으로 몇 번 들어보다가
취향에 딱 맞아 보관함에 넣어 자주 듣던 팀인데
이렇게 글라스토에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찾아 보니 시카고에서 온 팀이었고
실물을 보니 너무너무너무 어려보였다. (20대 초반은 되었으려나?!)
'여러분 다 여기서 자냐, 대단하다, 우리는 근처 호텔서 잔다'
정말 덤덤하게 말하는데 그 덤덤함이 골때리는 친구들이었다.
라이브는 음원처럼 아주 깔끔하고 건조했다.
재미있던 건, 그 건조함이 너무 산뜻했다.
정박의 드럼비트에 맞춰 웅얼거리는 보컬에 고개가 절로 까딱거리는데
모래냄새와 레몬냄새가 섞인 태양빛을 쬐는 것만 같았다.
놀랍게도 그 경험이 너무 좋았어서
나에게 2025 Glastonbury TOP5 공연을 꼽으라면 이 팀을 반드시 넣을 거다.
West Holts로 넘어 갔다.
Ca7riel & Paco Amoroso를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
최근 Tiny Desk 공연이 떡상하며
코첼라를 비롯한 여러 대형 페스티벌에 나오는 아르헨티나의 슈퍼스타 듀오인데
이지한 음악에 반하는 자극적인 가사와, 독특한 패션, 즐거운 퍼포먼스 모두 쏙 마음에 들었다.
영국서는 아직 그리 인기가 많지 않은지 앞자리에 자리잡았다.
근데 그 자리가 하필 아르헨티나 친구들이 자리잡은 곳이었다.
처음엔 분명 3~4명이었는데 자꾸 친구인지 가족인지가 추가되더니
한 10명쯤 되는 그룹이 되어 버렸다.
남미의 열정이 이런거구나 갑자기 너무.. 예상치 못하게 크게 느낄 수 있었다.
여튼 공연은 영상으로 보던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
대형 페스티벌에서 왜 불리는지 알 법한 팀이었다.
둘의 표정과 몸짓, 모든 애티튜드가 수많은 사람들을 홀리고 있었다.
아는 노래라곤 2~3곡 뿐이었건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즐기다 보니 그냥 끝이 나 버렸다.
사람들이 'Uno mas! Uno mas!'를 연호했다. 그들은 기다렸다는 듯 앵콜을 열창했다.
잠시간 아르헨티나에 다녀왔던 것 같다.
내리쬐는 햇살에 지쳐버려 정말 성의없는 작은 피자를 사 먹은 뒤
Glass beams의 공연을 설렁설렁 관람했다.
호주에서 온 아주 컨셉츄얼한 팀인데,
신기한 가면을 쓰고 동양적인 요소(Arabic?)를 잔뜩 넣은 듯한 사이키델릭 록을 연주한다.
KEXP였나?에서 보고 신기해서 라이브를 보고 싶었는데
실제로 보니 정말 더 신기했다.
금빛 단상에 한 명씩 올라 금빛 가면을 쓰고 연주하는데
분명 내 두 눈으로 그들을 보고 있는데 화면을 보는 느낌이었다.
그치만 좀 물리는 감이 있어 끝까지 자리를 지키지는 못했다.
서양인들에게는 그 동양적인 멜로디가 신비하고 힙하게 느껴지나 싶은데
동양인인 나에게는 아쉽게도 신비한 감흥이 덜했던 게 아닐까... 싶다.
그래도 좋은 경험이었다. 글라스토 아니면 한국서 절대 못 볼 팀 중 하나.
제일 기다리던 팀 중 하나인 Wet leg을 보러 갔다.
Catch these fists의 기타 리프와 함께 양 팔근육을 자랑하는 리안이 등장했는데
입틀막 하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멋있었기 때문.
표현의 한계에 통탄하며 쓸 수 밖에 없는 멘트... 개짱이었다.
신보의 컨셉이 이전작과 많이 다른데,
1집을 굉장히 좋아했던 팬으로서 내가 그 변화에 적응을 못했다 생각했었다.
근데 아니었다. 나는 적응을 진작에 마쳤던 것 같다. 등장과 함께 사랑에 빠졌다.
중독성있는 리프와 베이스라인에 정신을 못차리다가
English teacher와 시간이 겹쳐 눈물을 흘리며 파크스테이지로 발걸음을 향했다.
너무 아쉬워 아직도 슬프다. (영상 찾아보니 CPR이 너무 멋지더라)
그치만... 적어도 Longest and Loudest Scream은 함께 했으니 그걸로 되었다 위안한다.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길게 질렀다. 끊기면 다시 질렀다. 목이 아주 아팠고 아주 짜릿했다.
언니들 인기 더 많아져서, 내한을 한번쯤 와 주면 좋겠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어 보이니 다음을 기약해 보련다.
눈물을 흘리며 도착한 파크스테이지.
English Teacher를 기다리는 팬들이 생각보다 많았다.
Sorry를 연발하며 앞으로 전진했다.
(여기선 sorry만 할 줄 알면 누구나 무대 쪽으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This could be Texas 앨범을 너무 좋게 들어서 Wet leg만큼 기대하던 팀이었다.
근데 이상하게 크게 기억나는 장면이 없다.
그저 엄청 잘한다는 인상이 강했다.
보컬이자 프론트맨인 릴리폰테인의 읊조리는 듯한 노래와 작은 체구의 거대한 성량에는 울림이 있었고
다른 연주도 뭐 흠잡을 것 없었다. 분명히 훌륭한 무대였다.
근데 뭐랄까 이들의 라이브 퍼포밍보다 그들이 만든 음악이 더더 좋았다.
이게 무슨 소린지 쓰면서도 잘 모르겠는데, 음악이 워낙 좋으니 라이브의 감흥이 덜 했던 것 같다.
모르겠다. 다시 느껴볼 테니 내한 와줘 친구들아!
다음으론 핑크 팬서리스를 보러 멀고 먼 우지스로 출발했다.
뉴진스의 신선한 음악에 놀랐을 때 누군가 내게 '핑크 팬서리스 들어봐. 그게 원조야.'라고 말해 주었고
핑크 팬서리스를 들어보니 뉴진스의 재미가 덜해졌다. 그래서 한 번쯤 보고 싶었다.
시작 전에 도착했음에도 사람이 너무 많아 천막 밖으로 사람들이 가득했다.
열심히 비집고 들어가 외곽 쪽에 자리잡았다.
근데 내부가 너무 소란한데 반에 특유의 속삭이는 듯한 음색은 너무 가녀렸고
글라스토를 위해 뭔놈의 편곡을 너무 빡세게 해 놔서 뭔 노래를 하는건지 잘 들리지가 않았다.
넘 예쁘고 섹시하고 핫한데.. 그런데... 즐기긴 어려웠다.
이르게 빠져 나왔다.
Illegal 정도를 함께 부르고 즐겼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다시 그 먼 길을 걸어 티피에 돌아왔다.
쉬다가 유난히 목이 따가워서 사진을 찍어 보니 티셔츠 자국대로 무섭게 익어 있었다.
여섯 팀을 내리 본 영광의 자국이라 생각한다.
친구들은 The 1975를 보러 피라미드로 떠났고,
나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을 뿐더러 더 움직이다간 다음날 공연을 포기하게 될 것만 같아서 길게 쉬었다.
뜨끈한 물로 씻고, 침낭에서 뒹굴거리다가
하늘이 완전히 까매진 11시가 한참 넘어서야 다시 티피 밖으로 빠져나왔다.
West Holts로 향했다. 마리부 스테이츠를 조금이나마 보기 위해서였다.
무대에서 아주 멀찍이 떨어져서 구경했는데, 셋이 아주 화려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을 대동했는데,
마지막 곡인 Blackoak에서는 무언가 신성함마저 느껴졌다.
주도하는 보컬 없이도 이들이 오밤중에 모두를 빨아들일 수 있던 건
세련됨이라는 강력한 무기가 있기 때문 아니었을까 싶다.
Do that for you...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한껏 끌어올려진 감정을 가지고 바로 옆 Glsto Latino로 이동했다.
밤중 외출은 사실 Havana D'primera 때문이었다.
트래디셔널 쿠반뮤직을 하는 팀인데, 이런 곳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십여 년 전 쿠바 여행을 떠올리며 추억에 젖을 생각으로 기다렸고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아 뿔 사
내가 너무나도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여기는 새벽녘 찐들이 모이는 살사클럽이었고
아바나드프리메라는 감성적인 음악을 아름답게 연주한다기보다는
강렬한 살사댄스 클럽을 주도하는 파티의 선봉자 같은 역할이었다.
등장하자마자 거대한 팔을 들고 손을 흔들며 'Mira Mira Mira Mira'를 수십 번 외치는데 좀 무서울 지경이었다.
즐기고 싶었지만 즐길 수 없는 분위기였다.
전문 댄서같은 사람들이 객석을 휘몰아치며 섹시한 춤을 추고 있었고
다들 짝을 지어 스텝을 밟고 있었기에
혼자 후줄근한 차림으로 서서 즐기기엔 좀 과하게 머쓱했다.
두세곡 멀찍이 보다가 티피로 향했다.
실망감이 느껴지자 피로감이 두 배 세 배로 몰려 왔다.
돌아가는 길에는 실망감이 우스움으로 변했다.
내가 뭘 기대했던 걸까. 여긴 즐기러 오는 곳인데.
내 생각이 짧았던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쉬운 맘 어이없는 맘 공유하며 술 한잔이나 더 할까 싶었는데, 그럴 수 없었다.
방에 돌아오니 1975에서 체력을 소진한 친구들이 잠들기 직전이었다.
모두가 열심히 논 하루였다. 나도 그렇게 잠든 기억 없이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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