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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후기

[241026] 미확인 영혼들의 정기 모임 - 유령서점, 녹이녹, 릴리잇 머신

애플뮤직의 추천으로 유령서점의 개똥벌레를 처음 듣고난 뒤
좀 더 소프트한 다브다같은... 웅성거리는 전개와 무심한 여성 보컬이 마음에 들어 여러 번 EP를 돌려 들었다. 
이후 마침 시간이 비는 날 공연을 한다길래 예매했다.
그땐 미처 몰랐다. 저 날이 할로윈 주말이고 공연장은 홍대라는 사실을
 
어쩐지 공연 제목이 [미확인 영혼들의 정기 모임] 이라길래 뭔놈의 컨셉이 저런가 싶었다.
어쩐지 드레스코드를 까만색으로 정해주길래 뭔놈의 공연에서 드레스코드까지 정해주나 싶었다. 
 

그치만 말 잘듣는 나. 드레스코드 맞춰 갔다



여튼 홍대에 도착하니 차려입고 놀러나온 젊은이들이 바글거려서 약간 쫄아있는 상태로 공연장에 입성했다. 
 
공연장은 공상온도 라는 곳이었는데 평소에는 카페 겸 바로 운영된다고 한다. 
작은 공연장에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90% 이상 까만색 옷을 입고!) 들어차 있었다. 
 
위축된 마음을 달래고자 일단 맥주부터 사마셨다. 
빈 속에 맥주 두 병을 내리 부었더니
포스트록과 슈게이즈의 왕왕거림에 배가된 혼미함이 아찔했다.
이런 취기 덕에 젊은이들 틈바구니에서 좀 덜 쫄며 공연을 감상할 수 있었다. 
 

공상온도 내부. 작고 귀엽다



공연 순서는 릴리잇 머신  - 녹이녹 - 유령서점 이었다. 
 
릴리잇 머신은 예습하며 음반을 들어본 뒤 맘에 쏙 들어서 유령서점보다 더 많이 돌려 들었었다. 
그러나 내 기대가 너무 컸던 걸까 
음악 자체는 내가 아는 그 만족스런 음악이 맞지만 거칠고 앳된 라이브성이 긍정적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영상도 열심히 준비하신 듯했는데 그다지 조화로와 보이진 않았다.
감정이 음악 앞으로 너무 빨리 나와버린 느낌이었다. 
아직 성장할 날이 많이 남은 듯하니,
라이브 기회가 더 많이 생긴다면 그만큼 더 완숙한 공연을 만들어나가지 않을까 싶다.
그때까진 난 아마 음원을 찾아 듣겠지.
 

그래도 진심은 느껴지던 팀이다. 나중에 다시 한 번 공연을 볼 기회가 생기길.



녹이녹은 세 팀 중 유일하게 발매된 음원이 없어서 유투브로 라이브를 살짝 본게 전부였다.
가장 기대 없는 팀이었는데, 가장 만족스러운 팀이었다. 
보컬 없이 연주만 내리꽂는 인스트루멘탈 음악을 하는데, 포스트록이라 해야 하나 뭐 여튼
공연을 보며 그옛날 2010년쯤 스페이스공감의 헬로루키 결선에서 프렌지 공연을 처음 봤던 때가 떠올랐다.
몇 곡의 공연만으로 """세상에 이런 음악이 있구나!!!""" 충격받고 바로 음반을 사러 갔었는데...
취기 만땅 오른 채 맥주와 사탕을 번갈아 먹으며 이분들도 프렌지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과거만큼의 감명은 없었지만, 충분히 즐거웠다. 다시 말해 매우 좋았다는 뜻이다. 
이 팀은 음원을 꼭 발매해 주면 좋겠다.
 

녹이녹은 아주 레트로한 배경을 깔았다 왜인진 당최 모르겠다
사탕은 아주 훌륭한 맥주안주다 손바닥사탕 몇십년만인 것 같은데 존맛탱



마지막은 유령서점
이 공연에 오게 만든 팀이었는데, 공연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지쳐갔다.
연주는 좋았다. 음악도 워낙 좋고.
근데 보컬이... 보컬 역량이 아쉽다는 건 음원에서도 느껴지던 사실이지만, 
라이브에선 거의 들리지 않았고 들리는 것조차도 불안해서 아쉬움을 넘어 실망에 가까웠다. 
지금 생각하니 사운드가 잘 잡히지 않아서 듣기 좋지 않았던 건가 싶기도 한데
취기가 올라 뭘 분석하기보단 내 기분이 먼저였던 당시에는 그만 보고 싶었다. 
결국 마지막 몇 곡을 남기고 공연장을 빠져나왔다.
 

유령서점의 유령서점의 유령서점을 연주하던 유령서점



빠져나오니 9시가 넘은 시간, 홍대 거리에는 까만 옷을 입은 사람들이 더 그득거렸다.
어서 그곳을 벗어나 열차로 몸을 숨겼다.
 
하나하나의 연주가 모두 만족스럽지는 않았지만,
어떤 시간을 순간을 음악으로 가득 찬 공간에서 보낸다는 건 디폴트의 만족감이 있는 법.
게다가 세 팀 모두 공간을 더욱 크고 잘잘하고 어지럽게 메우는 음악을 하기 때문에 
그 공간감의 만족도를 매기자면 물론 '만족'이었다. 

그러고보면 소규모 공연장의 (출연자 대기석도 마땅치 않은) 인디밴드 합동 공연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실망이든 의외의 발견이든, 얻는게 무엇이라도
작은 공연을 왕왕 보러 다녀도 좋겠다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