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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들

엄마와 카작을

"쉬는 동안 어딜 다녀올까 해. 카자흐스탄이 생각보다 안전하다는데, 엄마 같이 갈래?"
"엄마는 무조건 좋아!"
이 두 마디의 대화로 엄마와의 생에 첫 둘만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출발 전엔 빠른 결정이 후회스러웠다. 
엄마가 어떡하면 편하게 아프지 않게 다닐 수 있을지
어떤 호텔이 괜찮은지, 어떤 투어가 덜 힘들지 
카자흐어와 러시아어를 내리 번역하며 고민하다보면 그 길던 집에서의 하루가 후딱 가곤 했고 두통이 남았다. 
 
전전긍긍의 날들을 뒤로 하고 알마티행 비행기
평소 비행기에선 쓰러져 잠드는 편인데도
공항 도착 이후의 과정을 한밤중 어찌 스무스하게 수행할지를 고심하다보니 잠이 하나도 오지 않았다. 
 

시끄러운 머리로 계속 바라보던 비행 지도



공항에 도착해 1단계를 수행하기도 전에 시련이 찾아왔다. 
수하물이 나오지 않았다. 
몇 십분을 동동거리다 옆 레일까지 살펴봤는데 뜬금없이 그곳에 우리의 수하물이 나와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이후 긴장이 풀려버렸다. 
 
얼렁뚱땅 수하물 사건 이후 우리의 여행엔 얼렁뚱땅 키워드가 계속해서 붙어 다녔다. 

새벽 출발 투어 집합 장소와 시간이 전날 오밤 중에 바뀌질 않나 (심지어 변경한 집합 시간에 여행사가 늦음)
또다른 투어는 예약 리스트에서 나를 누락시켰고 (대안으로 러시아어권 관광객 틈바구니에 낑겨 다님)
근데 이 여행사는 내가 돈 안냈다는 사실을 끝까지 까먹어 돈 받을 생각도 안하고 (결국 내 양심에 찔려 돈 냄)

심지어 안전서약서도 러시아어 뿐이었다 내용도 모르고 서명부터 하는 패기


내내 여름이다가 새벽녘 내린 비에 바로 겨울이 되어 여름용 바지 차림으로 설산 오르고 (심지어 신발은 샌들)

차가워용... 시려용...



사우나에서 러시아인과 피부색에 따른 땀 배출에 대한 얘기를 하는 도중, 그가 내 까만 피부를 살펴보고 인종차별성 발언에 대한 위험을 인지한 듯 대화를 황급히 끝내질 않나 (분명 나 그정도는 아님) 
쉬겠다고 들어온 휴양지 리조트에서는 새벽까지 생일파티 하는 카작인들 때문에 잠도 못자고 (생일 노래는 제발 한 번만 불러줘)
인당 200텡게인 트램 두 명이서 500텡게 내밀었더니 거스름돈 없다며 그냥 타라고 해서 공짜로 타고 다니고 (분명 현금 받는댔음)
쇼핑몰에서 카작서 최고로 영어 잘 하는 사람을 만나 신나서 대화했건만 여호와의 증인 전도하는 사람이었고 (다음날 출국이라니까 쉽게 우릴 놓아줌) 
호텔방 문고리가 떨어지질 않나 (여기 이동네에서 젤 유명한 호텔인데?)
그 호텔 온수 단수 사태로 씻지도 못하고 돌아다니다 한식당 사장님으로부터 온 동네가 그렇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장님도 이율 몰라 당황중이었음)


출국 전날 밤 엄마와 누워서 위 사건들을 하나하나 읊어 보니 그렇게 우스울 수가 없었다. 
함께 깔깔 웃었다. 
사건들로 인해 처음 저어했던 마음이 차츰 거리낌없어진 듯 했다. 
묘하게 허술한 이 곳, 그 덕에 만들어진 우스운 추억들 
 
얼렁뚱땅을 빼도 된다. 
 
나는 검은머리갈색찌르레기를 수없이 보았고, 고원에서 커다란 강아지들과 추억도 남기며 이집트 독수리를 발견했다. 
호수를 오가며 걷던 오솔길에서 평소 노래하지 않는 엄마가 옛날 생각이 난다며 노래를 불렀고 
밤 10시 달리는 버스 창밖으로 보이던 쏟아질 듯한 수많은 별들에 한껏 감상적인 시간을 보냈다. 
반짝이는 호수와 수십 미터의 침엽수를 바라보며 먹은 라면과 카스타드의 맛은 황홀했으며
잘못 시킨 소고기 요리를 나눠 먹으며 맥주 한 잔과 진솔한 - 주로 결혼하라는- 얘기를 나눈 밤도 계속 생각난다. 

해발 3000미터의 짱강아지
착한 사람은 보일 거다 우리의 이집트 독수리
여기서 먹은 라면밥은 최고로 맛있었다
엄마 나 결혼 천천히 할게



편안한 여행은 아니었다. 고생스러웠고 아팠고 예상 밖이었다. 
그치만 그 모든 걸 엄마와 함께 경험하고 헤쳐나갔다는 사실이 내내 따뜻해 어려움의 기억은 이내 엷어졌다. 
 
카작어로로 된 ATM 사용에 여러 번 실패했을 때 덜덜 떨리는 내 손을 잡아준 엄마의 손길은 부드러웠고 
숲길에서 어릴 적 신작로 걷던 얘기를 하며 들꽃 사진을 찍던 엄마의 모습이 어여뻤다. 
 

엄마 어릴적 얘기를 나누던 숲길
엄마와의 사진도 잔뜩 늘었다.


그곳에 엄마의 못보던 모습이 있었고 알고 있던 모습도 다시금 보였다. 
함께 다녀오길 잘 했다.

단, 여독이 평소보다 오래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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