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해영의 [다른 듯 다르지 않은]
요즘 탐조에 빠져 있다.
아무리 사진으로 영상으로 여러 번 봤던 새의 특징, 울음소리, 생활상이라도
직접 눈과 귀로 보고 들어야 깊이 새겨진다는 게 재미있다.
직접 봐야 한다. 직접 이야기를 들어 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알 수 없다. 안다고 할 수 없다.
책을 읽는 동안 이 생각이 특히 강화되었다.
이 책의 부재는 다음과 같다.
장애여성들이 오롯이 구성한 성과 사랑, 섹슈얼리티의 의미
오롯이 구성했다는 건 장애여성들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담았다는 거다.
나는 장애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편협한 매체들을 통해 인지하고 있던 장애인들의 삶, 그 좁디 좁은 시야에 성과 사랑의 키워드가 있었는가?
아니지, 성과 사랑의 키워드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해 봤는가?
의외성으로부터의 충격과 묘한 어색함이 흘렀다. 그동안 미욱했다.
깨고자 노력하나 깨어지지 않는 사회의 일원으로 나의 한계에 부딪혔다.
나는 나를 나로 생각한다. 그리고 너를 너 개인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장애인을 생각할 땐 그리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들의 섹슈얼하고 로맨틱한 경험, 가정을 이루고 엄마가 되는 과정까지를 사회적 시선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도 성인이고, 선택을 하고, 책임을 진다.
이 당연함을 왜 먼저 생각하지 못한 건지
물론 사회적 시선을 배제할 수는 없기에 아직 맘속 저어함이 남아있다.
그들의 선택과 책임에 수많은 보조장치가 필요하며 그 보조장치는 정교해야만 한다.
보조장치를 어디에서 어떻게 제작할 것인지, 정교성을 누가 어떤 방식으로 확보할 것인지에 대해
길고 합리적인 사회적 논의가 아주 많이 필요할 거다.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이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지는 명확해 보인다.
소통하는 거다. 전문가나 시설의 연구로부터가 아닌 그들의 진짜 목소리를 들어야 할 것 같다.
어이없게도 그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선행되어야 할 것이 더 있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여성을 만나기는 정말 쉽지 않다.
그들이 밖으로 나오지 않는 건지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건지, 이건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답이 정해져 있다.
장애여성의 안전한 사회활동의 기반이 생성될 때 그들을 만날 수 있고, 만나야 소통할 수 있고, 소통해야 개인으로 바라볼 수 있고, 개인으로 바라봐야 담론을 꺼내고, 담론을 꺼내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거다.
생각을 정리한 후에야 이 책의 제목이 다시 눈에 들어 왔다.
우리는 분명 다른 듯 다르지 않다. 그러니 같(을 수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