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두루미들은 머나먼 비행에 어떤 생각을 할까
여느때처럼 인스타로 귀여운 앵무새를 탐하던 어느날
운명처럼 탐조여행 광고가 내 피드에 올라왔고
참을 수 없는 궁금증에 그날 바로 신청을 해버렸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건 만고의 진리이다.
알고 보니 서울서 3시간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정말 많은, 다양한, 신기한, 생각지도 못한, 아름답고, 귀엽고, 토실한 새들이 있었다
[흑두루미 탐조 여행]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프로그램이기에
흑두루미만 잔뜩 보겠지 생각했는데 이게 웬걸
탐조 경험 전무한 쪼렙이 쌍안경 하나로(실은 인솔자 선생님의 멋드러진 망원경 덕도 보긴 했음)
1박 2일간 순천만 습지에서 발견한 새들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흑두루미
댕기물떼새
쇠오리
흰뺨검둥오리
청둥오리
검은목두루미
큰기러기
털발말똥가리
독수리
노랑부리저어새
왜가리
검은머리갈매기
비오리
긴목큰기러기
도요새
가마우지
흰죽지
+필리핀에서 막 날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름모를 물떼새 무리
말 그대로 대혜자 콘텐츠였다.

습지에 도착하고 처음 흑두루미 떼를 봤을 때는 온몸에 땀이 났다.
왠지모를 감동에 마음에 격랑이 일었다.
비현실적이었다. 정말 많았고 정말 커다랬다.
아기두루미와 엄빠두루미가 함께 있는 모습은 너무나도 만화같았다.
땀은 계속되었다.
매년 같은 자리에 찾아온다는 한 마리의 댕기물떼새를 보니 귀여움에 질식할 것 같았다.
그 옆의 오리들은? 나는 세상에 오리가 이렇게 고운 색을 가진 예쁜 새인지 왜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책이나 다큐에서만 보던 광경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얘네들은 어떤 시대를 어떤 방식으로 밟아왔길래 이리도 다채로운 모양새를 하고 있을까.
찬란한 새들의 시원이 궁금했다.

흑두루미를 비롯한 대부분의 새들은 겨우나기를 위해 윗지방에서 내려오는 철새들이었다.
머나먼 시베리아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매년 이곳 순천까지 내려오는 철새들은
긴긴 비행에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출퇴근 소요 시간이 긴 편이다.
지옥철에 몸을 맡기고 사무실로 향할 때 현타가 오기도 한다. (아니 자주 온다)
그치만 이 짓 그만둬야지 싶다가도
관성에 몸을 맡겨 매일 아침 일곱시 반에 집을 나서고
퇴근길 친구와의 술약속에 하루를 버틴다.
별 생각 없을 때가 더 많고 그게 더 평온하다.
흑두루미도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관성처럼 겨울이 오면 긴 비행에 나서고
순천만 습지의 풍족한 식사에 소소히 행복한 시간을 보내기
엄청 힘들어 보이고 실제로도 힘든 과정이지만
그런게 사는 거니까,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런 거다.
흑두루미나 나나 뭐 별다를 것 있겠나
너도 나도 자연의 일부다/ 삶이 힘들지 않은 생명체는 없다/ 고생이 있으면 낙이(작든 크든) 있긴 있다/ 대자연 속 유기체 대통합 유니버스...
뭐 여튼 그냥 이렇게 저렇게 살던대로 살면
내가 흑두루미를 보면서 멋지다 생각하는 것처럼
나도 다른 시선에선 엄청 멋질 수 있겠다 싶었다
다들 스스로 인지하지 못한 채 땀이 나도록 멋진 인생을 살고 있을지 모른다.
따봉흑두루미야 고마워!

++++++
그나저나
이번 투어는 [코리아버드사파리] 라는 곳에서 기획된 것이었다.
두서없이 찬탄만 나열한 이 글을 조금이라도 집중하여 읽어주셨다면(감사합니다.) 당연한 결론이라 생각하겠지만…
크게 추천한다.
코리아버드사파리 (koreabirdsafari.co.kr)
코리아버드사파리
새들이 이끄는 잠시간의 유토피아
koreabirdsafari.co.kr
초심자에게 부담스럽지 않은 수준의 탐조 밀도와 난이도였고, 밥도 숙소도 훌륭했다.
새를 보호해야 한다는 환경 보호 주제에 표면적으로 포커싱된 것이 아니라,
쉽게 겪지 못하던 새들을 관찰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여행이라 더욱 좋았다.
괜히 학습적인 요소가 들어가면 반발심이 들기 마련이지 않나?
새들을 바라보며 신기함을 느끼고 고귀함을 느끼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새와 자연(나 포함)을 향한 사랑이 싹텄다.
내리쬐어 반사시키지 않고, 내면에서 투과되어 피어오르는 참교육의 현장이었다.
누구든 한 번쯤 경험하면 좋겠다.